집을 나왔다. 자의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명백한 타의였다. 그래, 잘 다녀오렴.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없었지만, 그 새벽바람이 속삭였다. 어디 한번 잘. 다녀오렴. 바람에서 할머니 냄새가 났다. 도망쳐 온 곳이 정작 여기라니 비죽 웃음이 세어 나왔다. 녹슬어 기울어진 초록 대문을 힘주어 밀고 들어가자 바람이 멈췄다.
교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러니까 누구라고 했더라. 아무튼, 딱 그 나이 또래 사내 녀석들의 장난 같은 괴롭힘이었다. 처음에는 이름을 물었고 대꾸가 없자 나중에는 나를 '재수 없는 전원우'라고 불렀다. 이름, 알고 있네. 말하려다 그냥 속으로 살짝 웃고 말았다. 위협적이지 않은 괴롭힘이었다. 그럴만한 힘도 대꾸할 가치도 없었거니와 제일 큰 이유는 귀찮았고 시시했다.
쿨럭.
내가 처음 온 날, 그러니까 한 달 전에도 담임이라는 남자는 저렇게 기침을 하며 나를 소개했었다.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의 사내 녀석이 하나 추가되었다.
교실은 이제 서른네 명의 열아홉과 스물한 살의 내가 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종이냐. 홀로 묻고 홀로 놀라는 새로 추가된 사내 녀석을 말없이 쳐다보다 교실을 나섰다. 첫 교시가 뭐더라. 따위를 생각하면서.
조용히, 그렇지만 빠르게 학교를 정리한 옆자리 주인을 찾는 담임이 쿨럭 기침했다. 교무실로 오래. 분명 담임의 호출을 전했건만 움직일 생각이 없다. 톡. 톡. 토옥. 톡톡. 의미 없이 책상만 두드리고 있다. 다음 교시를 준비하는 나를 응시하며 그렇게 오래도록. 예비종이 울리고 나서야 드르륵 의자를 끌고 일어난 옆자리 주인은 교실을 나섰다. 다음 시간은 수리 시간이었다. 기침이 잦은 담임은 수리를 가르쳤다.
책상에 곱게 올려준 초코빵이 마음에 차지 않았는지 한입 베어 문 빵이 그대로 얼굴로 날라왔다. 초콜릿 향이 훅 끼쳐왔다. 할머니는 박하사탕보다 초콜릿 사탕을 좋아하셨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교실 바닥에 처박힌 빵에 할머니 주름진 얼굴이 겹쳐졌다. 하얀 병실 하얀 천 아래 주름진 할머니의 손. 까지 생각 했을 때 물벼락이 쏟아졌다. 뭐, 별일 아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던 하얀 병실, 하얀 이불, 하얀 천 하얀 그곳과 어울리지 않게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도련님, 이제 그만 가셔야 합니다.
어디로?
찬물에 손이 발갛게 변했지만 움직이기 싫었다. 검은 물이 빠진 셔츠를 보자 다시 그날이 떠올랐다. 검은 옷. 검은 집. 검은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 하얀 할머니. 전원우 너희 아빠 조폭이라며? 우리 엄마가 이제 너랑 놀지 말래. 하나둘 떠나는 사람들. 어두운 방 훌쩍거리는 날 다독인 주름진 하얀 손. 할미 집에 갈텨? 초코맛 사탕을 건네며 웃어주던 하얀 할머니.
"그런다고 더러운 게 깨끗해지나"
그래 그랬다. 더러움에서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하얗던 교복도 하얀 운동화도 전부 더러운 아버지의 돈이었다. 더러운 건 깨끗해질 수가 없다. 다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가을 끝자락에 내린 비는 꽤 거칠었고 성큼 겨울을 데려왔다. 오전 내 내리던 비가 멈췄고 손에 든 기다란 우산을 들어 흙탕물을 튀기던 강석대 무리를 지나쳐 골목을 돌고 나서야 얼룩진 운동화가 보였다. 종전에는 하얗던 운동화에 흙탕물이 튀어 얼룩얼룩해졌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며칠째 뒤를 쫓는 발소리에 의문이 가득했다. 나도 조금 의문스러웠다. 이쯤에서 휙 돌아봐 곤란하게 해줄까 하다 그냥 픽 웃고 말았다. 녹이 잔뜩 슨 초록 대문을 밀고 들어가자 뒤를 지키던 단단한 발소리가 멈췄다. 어쩐지 조금 아쉬워졌다. 얼룩진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고 담장 너머를 바라봤다. 담장보다 훌쩍 큰 머리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라면은 있어"
"..."
"뭐해? 와서 끓여"
담장보다 높다란 머리통에서 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곧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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